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러들로 학살 (문단 편집) === 학살 === || [[파일:콜로라도의 계급전쟁.jpg|width=400]] || || '''콜로라도의 계급전쟁(CLASS WAR IN COLORADO)'''[* 당시 사건을 다룬 기사 제목이다.] [br] 당시 사건을 다룬 잡지의 표지 || || [[파일:러들로 학살 현장.jpg|width=400]] || || '''이 안에서 [[어린이]]와 [[여자]] 13명이 목숨을 잃었다.''' || [[1914년]] [[4월 20일]] [[주방위군]] 2개 중대가 천막촌 근처에 진을 쳤다. 이들은 대략 1,000여 명의 남녀와 어린이들이 살고 있던 러들로의 천막촌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에 주둔해 있었다. 이 날은 사측과 광부 측에서 최종 협상이 있었는데 그 사이 민병대와 주방위군이 [[개틀링 기관총]]을 천막촌이 보이는 산 측면에 설치했다. 곧이어 광부들과 [[군인]]들의 충돌이 발생하자 오후 7시 천막촌 곳곳에서 군인들에 의해 화재가 발생했고 동시에 민병대와 주방위군의 무차별적 발포가 시작되었다. 천막촌은 전소되었고 천막촌 안의 굴에서 생활하던 광부들의 가족들까지 불길 속에 갇히고 말았다. 11명의 어린이들과 2명의 여자가 그 굴 속에서 목숨을 잃은 채로 다음 날 전화 가설공에 의해 발견되었다. '''죽은 아이들은 11살이었던 1명을 빼고 모두 10살 미만이었다.''' 이 날 천막촌 주민 19명, 주 방위군 3명, 민병대 1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발생했다. 이들을 돕기 위해 [[적십자]]에서 구호 작업을 벌이고자 했지만 군인들에 의해 제지당했다. * '''사망자 명단''' || 이름 || 나이 || 비고 || || 존 바토로티(John Bartolotti) || 45 || || || 찰리 코스타(Charlie Costa) || 31 || || || 페델리나 코스타(Fedelina Costa) || 27 || 여성 || || 루시 코스타(Lucy Costa) || 4 || || || 오노프리오 코스타(Onofrio Costa) || 6 || || || 제임스 파일러(James Fyler) || 43 || || || 클로리바 페드레곤(Cloriva Pedregon) || 4 || || || 로드겔로 페드레곤(Rodgerlo Pedregon) || 6 || || || 프랭크 페트루시(Frank Petrucci) || 4 || || || 조 페트루시(Joe Petrucci) || 4 || || || 루시 페트루시(Lucy Petrucci) || 2 || 최연소 사망자 || || 프랭크 루비노(Frank Rubino) || 23 || || || 윌리엄 스니덜 주니어(William Snyder Jr) || 11 || || || 루이스 티카스(Louis Tikas)[* 파업 지도자였던 그는 군인들에 의해 난타당하고 수십 발의 총알이 박힌 처참한 상태로 발견되었다.] || 30 || 파업 지도자 || || 조지 울먼(George Ullman) || 56 || 최고령 사망자 || || 엘비라 발데즈(Elvira Valdez) || 3 || || || 에우라라 발데즈(Eulala Valdez) || 8 || || || 메리 발데즈(Mary Valdez) || 7 || || || 패트리아 발데즈(Patria Valdez) || 37 || 여성 || 이 소식은 전미에 신속하게 퍼졌고 콜로라도의 주도인 [[덴버]]에서는 전미광산노조가 '무장 호소문'을 발표했다. 다른 천막촌에서는 300명의 무장한 파업광부들이 러들로 지역으로 행진하여 전화선과 전신선을 끊고 전투를 준비했다. 이러한 학살 행위에 분노한 광부들은 함께 무장하여 투쟁할 것을 촉구했고 광산 소유의 재산들을 공격하여 파괴하였다. 광부들은 민병대와 주방위군과도 격렬하게 충돌했고, 양측에서 많은 사상자가 나왔다. 결국 [[미군|연방군]]이 투입되고 나서야 상황을 겨우 안정시킬 수 있었다. 그리하여 [[파업]]을 일으킨 광부들과 사측 임원들은 법정에 서야 했다. 하지만 광부 측에서는 체포된 332명 대부분이 [[유죄]] 판결이 나온 반면 사측에서는 민병대 장교 1명만 [[솜방망이]] 처벌을 받았다. 충돌 기간 동안 66명이 [[살해]]되었지만 민병대원이나 광산 경비원은 한명도 기소되지 않았다.[* 미국 민중사 I, p.608] 그러자 덴버의 주정부 청사 앞 잔디밭에서는 5,000명이 시위를 벌이면서 러들로에 있던 주방위군 장교들을 살인죄로 재판에 회부할 것을 요구했고, 주지사는 부속품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전국 각지에서도 집회와 시위가 일어났으며, [[뉴욕시]] [[브로드웨이]] 26번지에 있는 록펠러의 집무실 앞에서는 피켓을 든 행진이 이어졌다. 어떤 [[목사]]는 록펠러가 가끔 설교를 하던 [[교회]] 앞에서 항의하다 경찰에게 곤봉세례를 당했다. [[뉴욕타임스]]도 국제적 관심을 끌어 모으고 있던 콜로라도 사태를 사설로 다뤘지만 이 신문은 잔학행위가 아닌 전술상의 실수를 강조할 뿐이었다.[* 미국 민중사 I, p.607]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